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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

누아르 파이낸스 페이트

by 자위심도 2025.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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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밤은 언제나 그렇듯 잔인했다. 회색빛 하늘 아래, 태민은 텅 빈 거리를 한 걸음씩 내디뎠다. 한때는 숫자와 권력의 마법에 홀린 채 황금 제국의 정상에 우뚝 섰던 그였지만, 이제 그의 발걸음은 무겁고 지친 허망함 그 자체였다. 어둠에 젖은 거리의 불빛은 그를 비웃듯 흐릿하게 깜빡였고,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엔 지난 날의 영광과 잃어버린 온기가 얼어붙어 있었다.

 

한때 그에게는 모든 것이 있었다. 야망과 열정, 그리고 무수한 돈과 명예가 그의 세상을 채웠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결국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금, 태민은 그저 쓸쓸한 그림자처럼 길을 걷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들은 차갑게 흩어졌고, 밤바람에 날리는 잔향처럼 사라져 갔다. “내가 이룬 건 단지 숫자의 장난에 불과했어.” 자기 자신에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차갑고 공허했다.

 

태민은 무심코 들어선 한 허름한 술집 문턱에서 잠시 멈춰 섰다. 네온사인은 피곤한 듯 깜빡였고, 창밖의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며 차가운 속삭임을 전했다. 그는 어두운 구석 자리에 앉아, 희미한 조명 아래서 낡은 위스키 잔을 들어 올렸다. 잔 속의 갈색 액체는 마치 그의 지난 날을 담은 것처럼 우울하고 무거웠다. 술집 안은 조용했고, 주변 사람들의 대화 소리마저 허전하게 메아리쳤다.

 

잠시 후, 그의 옆자리에 한 남자가 다가와 조용히 자리를 채웠다. 그 남자는 깊은 주름진 얼굴과 침울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지나간 날의 아픔을 담고 있는 듯했다. "너도 결국 이 도시의 잔해가 되어버린 건가?" 그 남자의 질문은 차갑게 떨어진 빗방울처럼 태민의 마음을 적셨다. 태민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이룬 모든 것이 허상뿐이야. 돈도, 명예도, 결국은 내 영혼을 팔아버린 거래에 불과했지."

 

그의 말에 술집 안의 공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잔을 기울이는 동안 태민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았다. 젊은 시절,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그때, 그는 세상의 모든 수치를 손 안에 담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매 순간을 위해 흘린 땀과 피, 그리고 버린 인간적인 온기가 결국 그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회색빛 도시의 거리는 그에게 차갑고 무자비한 법칙만을 가르쳐 주었고, 이제 그는 그 법칙의 굴레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말았다.

 

바깥에서는 빗줄기가 더욱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고, 술집 창밖의 네온 불빛은 희미하게 떨렸다. 태민은 창가에 앉아 비를 바라보며 자신에게 묻곤 했다.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대답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허망한 계산 속에 묻혀 버린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끝없는 공허와 절망뿐이었다. 그의 내면은 과거의 찬란했던 순간들로부터 멀어져 갔고, 그 대신 끝없는 밤의 어둠이 그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시간은 점점 깊어졌고, 술집 안의 불빛마저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태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쌓아온 모든 성취들이 결국은 잿더미 속에 불과하다는 절망에 잠겼다. "내 모든 것은 이제 끝난 것인가?" 그는 스스로에게 묻지만, 대답은 오직 침묵뿐이었다. 외로움은 그에게 이미 오래전부터 익숙해진 동반자였고, 그 동반자는 지금도 여전히 그의 발자취를 따라다녔다.

 

그날 밤, 태민은 술집을 나서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거리는 여전히 비에 젖어 있었고, 각자의 고독을 안고 걷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잃어버린 영혼들의 행렬처럼 보였다. 그 행렬 속에서 태민은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작고 무의미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모든 게 다 끝난 건가." 그는 스스로에게 되뇌였다. 차가운 비가 그의 어깨를 적시며, 그 모든 허망함을 더욱 선명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새벽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비 내리는 골목 어귀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거칠게 다가왔다. 그의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는 익숙한 불길함을 예고하고 있었다. 태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빚진 자들의 최후라니, 그 말이 맞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심각할 건 없었다. "이쯤에서 영화처럼 끝나면 멋지겠지?" 그는 혼잣말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게 흘러갔다. 발소리의 주인공은 단순한 행인이었고, 골목은 언제나처럼 비에 젖어 있을 뿐이었다. 태민은 웃으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모든 게 끝난 것 같아 보였지만, 세상은 그의 드라마에 관심이 없었다. 결국, 이 모든 건 그의 머릿속에서만 떠도는 하드보일드한 우스운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래, 황금 제국이 무너진다느니, 사라진다느니... 헛소리는 이제 그만해야겠군." 그는 피식 웃으며 거리를 걸어갔다. 비는 여전히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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